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국자감에 들어가기 전, 산사는 아버지의 권유로 귀족 사교회에 발을 들여논 적이 몇 번 있었다. 아버지는 본가와 유리되어 별당에서만 살아온 딸의 지난 세월을 보상하고자 했다. 산사는 별다른 사교활동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는 완전히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아버지는 산사를 염려했다. 옹주의 사교회에서 산사는 고귀한 가문의 귀공녀로서, 아름다운 외모와 학식에 대한 평판으로 인해 금세 관심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곧 국자감에 들어가기로 하셨다면서요?”
유난히 목소리가 달콤하고 은근하던 한 귀족가의 영애는 초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가문도 좋고, 재능도 출중하시니 앞으로 바라보시는게 크시겠어요.”
국부인(國夫人)이 되어 세간의 우러름을 두루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천자의 꽃이 되어 영화를 누리시렵니까?
초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산사에게 학식學識이란 재물과 권력의 수단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여 별당에 있으면서도 떼어두지 못하는 것이고, 아버지는 어머니 곁을 지켜드리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믿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수와 무지의 시절이 봄볕 강에 낀 살얼음처럼 산산이 깨지고 흐물 흐물 녹아 흐뜨러졌을 때 산사는 한 가지 깨달았다. 무지는 그녀를 고통에 빠뜨릴 죄이며 어리석음은 족쇄라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초하가 잡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손은 모두가 그녀에게 쉬쉬하고 있을 때 다가와 학문의 길을 가르치고, 바깥 세상으로 끌어내 주려던 스승 뿐이었다.
초하는 스승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배움에 자신을 던져넣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그녀는 더 이상 무지하지 않을 것이다. 남이 아는 것을, 더 이상 자신이 모르는 일은 없으리라 다짐했다. 초하 자신이 모르는 것은 남도 모르는 것이어야만 했다. 철학과 진리와 세상의 모든 지식은 그녀의 길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거짓과 기만에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의 길을.
국자감에 들어온 공자녀들은 모두 나라에서 손 꼽히는 수재들이었다. 국자감으로 떠나던 날 산사는 더 이상은 믿을 것도 마음을 줄 것도 남아있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배움에 열의와 혹은 갈망을 품어온 이들과 만난다는 사실에 얼마쯤 설레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산사의 그런 기대가 조각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국자감에 들어온 어떤 공녀들에게 그것은 단지 훌륭한 가문에 시집가기 전 자신의 높은 교양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 같은 것이었다. 고귀하게 자라고, 자라서 고관대작의 부인이 된다는 사실마저 너무나 당연해서, 국자감은 단지 흘러가듯 지나가는 수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희시 합격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물론 공자들은 경우가 좀 달랐지만 ─ 산사는 자연스럽게 공녀들보다 더 많은 수의 공자들과 어울렸고 때때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들은 천자와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치는 문무백관의 길을 고민하는데 반해 산사의 앞에 놓인, 그녀가 학문을 닦는 의의가 될 미래는 말품 무관이나 국자감 학사, 명예직인 산관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이 배움에 대한 그녀의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 모든 공자들이 열심히 수학의 길을 걷는 것 또한 아니었다. 국자감 생도라고하면 세간에서 입에 담을 때에도 상당한 존경심이 어리기 마련이었는데, 그들은 그러한 존경이 무색하도록 주색잡기와 한량질에 열심히였다.
산사는 그런 그들을 혐오했다.
지성을 이룰 수 있는 재능과 환경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올바로 쓰지 않는 천치들.
하지만 모두에게 그렇듯이, 산사는 그들에게도 딱히 못마땅함을 깊이 느낄 만큼의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들의 습성을 혐오 했지만, 대놓고 눈살을 지푸릴만큼 감정이 우러나오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산사는 학문에 정진하고자 스스로 학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이들도 그들의 열정을 존경하고 맘에 들어 할 뿐이지, 그들 자체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산사의 마음 속은 모든 것이 생명의 태동을 멈추어 버린 겨울 같았다. 사람에 대한 어떤 감정도 새로 움트거나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별달리 주목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눈과 머릿 속에 들어오는 이들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법이다.
주 가의 공자 준원이 그러했다. 큰 형은 입학과 졸업을 수석으로 마친 국자감 유일의 천재고, 작은 형은 병기에 통달했고 병부에서도 탐냈던 유능한 무관. 앞의 두 형들에 비해 좀 모자르긴 했지만 그도 어린 나이에 상당히 좋은 성적으로 국자감에 합격했고, 신진 환영회 자리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좌중의 시선을 모으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산사조차도 그런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토록 재능 있는 형들과, 지식에 대한 열의가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햇살이 좋은 오후였다. 산사는 강의와 강의 사이의 빈 시간을 쓸데 없는 담소로 채울 생각은 없었고, 그 사실이 그녀를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교사 뒤 나무 밑으로 이끌었다. 오랜 독서로 침침해진 눈을 쉬게 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발견했다. 저만치 떨어진 곳, 그러나 분명히 형상은 분간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권태로운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준원의 모습.
그가 그다지 훌륭한 학생은 아님이 밝혀진 뒤에도 거의 대부분의 국자감 생도들은 그를 선망하고 있었다. 아니 동경, 두려움, 혹은 인정… 뭐라고 불러야 정확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간 여생도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사내임은 분명했다. 산사는 자신을 향한 주변의 시선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고갯짓을 보며 옅은 환멸감을 느꼈다. 산사는 그가 조정에 입시하기도 전에 꽤 뛰어난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구태여 신경쓰지 않아도 눈에 띄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녔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산사가 그에게 지닌 일말의 관심조차도 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존재감은 소란스러웠다. 그의 무리들은 아무리 산사라도 모르고 지나가기는 힘든 악질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언젠가 산사에게도 다가온 무리 중의 어느 누군가를 그녀는 있는 힘껏 무시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산사도 귀가 있는 이상 담지 않기 어려운 쟁알거림들.
그녀는 그 소란에 끼어들 필요도, 구태여 응징할 이유도 없다. 비록 자신이 그 안에 들어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산사의 마음은 알을 낳기를 포기한 철새와도 같았다.
그녀는 곧 그 자리를 떠났다. 끝까지 돌아볼 가치조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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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담... 보여드리는 건 더 늦어서 죄송...
갈팡질팡하는 글은 더 죄송. 그래도 붙이면 좋으니까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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