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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전/연록흔

< 예영대문학 > 꽃답게, 붉고 둥근 꽃 그대로 떨어졌다. - 2

by Sonali 2013. 3. 30.




다음 날 아침해가 채 다 뜨기 전에 궁녀들이 봉씨의 신변을 왕의 안전으로부터 물렸다. 그녀는 다시는 왕의 앞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상기시키는 피조물을 좋아할 지배자는 없었으므로.


이한은 다음 날 등청한 연익으로부터 연각이 관부에 결석계를 쓸 정도로 크게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한은 말을 아꼈고, 연익의 편으로 약재를 보냈다. 그녀가 다소 호전되어 등청하게 된 이후에도 이한은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라며 그녀를 전처럼 아수에 부르지 않았다. 연각의 성품은 충성스러울지언정 순종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늘 고집이 있고 곧았다. 그러나 왕의 이번 명에 연각은 한 마디도 토를 달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침묵으로 왕명을 받잡았다. 이한은 연각이 인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둘은 쌍둥이 성城. 같은 길 위에 선, 그래서 영원히 평행선을 이루고 세워져 있다는 걸….


연각이 떠난 왕의 집무실에 또다른 여자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있지 않아서였다. 아, 신은 겨울의 남은 날이 짧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확인시켜주시는가. 틈을 보이지 않고 연달아 불어닥치는 맹렬한 추위는 겨울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 여자가 이한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니, 파도가 그의 모래성 위로 몰려왔다. 눌러 덮쳤다.


그는 희재는 자신의 무덤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갈급한 키스를 하고 그녀를 들어올려 자신이 줄곧 세상을 쓰던 그 장소 위에 눕혔다. 사실 그 세상은 그녀의 등이 닿기 전에 이미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너져 내려 곧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 희재는 무너지고 새로 지은 세상에 처음으로 몸을 누인 피조물. 처음이란 언제나 고독한 법이다. 그녀가 파도가 되어 이한의 고고하고 연약한 첨탑은 허물어지고, 흰 돌로 지은 성이 세워졌다. 그것은 바람을 휘감고, 눈비 맞으며 그곳에 꼿꼿이 서 있을 것이다.


처음이란 언제나 고독한 법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왕의 비妃가 되어달라고 한 이유였다. 이한은 그러나 그녀를 고독하게하는 것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


봉씨의 일이 있은 이후 예영의 첫 방문은 왕의 명령 없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왕의 명도 받은 일 없이 아수를 찾았는데 비 책봉식으로 분주한 아수궁은 그녀를 별달리 주목하지 않았다.


스스로 접견 요청을 하는 그녀는 오랜만이었다. 왕은 마치 그들이 처음 만나던 때로 돌아간 것같은 감상에 사로잡힐 것도 같았다. 특히 그녀가 왕의 앞에 섰을 때, 그는 둘이 처음 마주하던 그 때가 눈 앞에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몸 안의 오각五覺이 날카롭게 살아나 그녀의 눈빛과, 호흡과, 말소리를 포착하고 한데 어우른다. 그 때 그 잔약한 몸으로 그녀는 왕을 놀라게 했었지.

오늘도 그녀는 왕을 놀라게할까. 어쩌면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왕은 그녀를 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백꽃을 보낸 것도…. 내 기다림을 너에게 준 것도.


그런데, 왕은 봄의 이름을 준 여자를 자신의 옆에 세웠다.


“비 마마를…”


약관을 훌쩍 넘어 어느새 이립을 향해 가고 있는 왕이 정비를 들이지 않음은 그간 많은 신료들의 걱정거리였다. 왕은 오랫동안 그 일에 무심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고 천명된 일에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한은 연각이 왕의 재사로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연각이 꺼낸 이야기는 조금 다른 것이었으나.


하지만 봄은 그처럼 갑자기 오는 것이다. 기다리던 것은, 어느 것이나 갑자기.

연각, 그녀를 왕의 동백이라 칭하면서 그는 무엇을 기다렸나.


왕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연각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놀라야했는데, 얼굴은 경직되지도 놀라움에 물들지도 않았고 다만 담담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여문사 예영의 입을 타고 나왔지만 그는 그 사실이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연각이 이렇게 물어올 것을 알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연각이 그에게 그것을 물어줄 유일한 사람임을.

연각은 언제나 이한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빛으로 채워질 것임을 어느 순간에고 믿고 있었던….


그러나 이한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틈을 두었다. 그는 연각에게 시간을 준 것이다. 날개를 내렸던 때처럼, 이한의 대답은 연각의 항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은 결국 언제까지나 고요였다.


사랑한다.

고는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폐허 위에 내려놓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것이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희재를. 그의 입에서 떨어진 이름이 붉고 또렷했다. 그녀를 안은 날 처음 그 이름을 소리내어 부른 이후로, 그녀를 희재라고 이르는 왕의 혀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남지 않았다. 빛熙이 닿아 뜨거운 자리마저도 달게 삼켰다.


대답하고 입을 다물며, 이한은 자신의 다음 말을 가늠해보았다.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그런 질문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한은 오히려 묻고 싶었다. 네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냐고. 이한은 까닭을 모르는데, 그 말이 이한의 귓가에 들렸다.

이한은 기다리던 봄을 향해 나아가는데 파도에 성을 무너뜨리고 가는데, 연각 너는 누가 있어 네 우물 밑에 빠뜨린 … 찾아주지.



왕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왜 너는 그런 말을 했었지.

모두 의심하셔야 한다고…

연각, 쌍옥珏. 그 때 나는.

골라 듣고, 골라 생각하셔야 한다고…

아직 동백이 질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아니, 아직 기다림[각주:1]이 피고질 계절이었다.




이한은 웃었다.

“연각, 너의 말은 모두 담아두고 있다.”

한 때 내가 너의 빈 우물에 하나씩 담기는 사람이기를 바랐던 것처럼. 




-


적당의 여문사, 적명의 붉은 동백. 대문학 예영이 사직의 서書를 올렸다.

지금과 같은 때에, 까닭은 단 하나 뿐이었다.


“정혼자가 있단 말은 못 들었는데.”


연각이 부복했다. 이한은 그녀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 눈 앞에서 구슬이 알알이 쏟아져 모이는 것을 보듯이.

시강, 적왕의 첫사람. 길의 앞머리. 왕은 시강이 그에게 비를 권하던 때와, 희재 앞에 무릎 꿇던 그를 상기하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그 순간 모든 것이 머리가 꼬리를 잡듯 자연스러운 순환이자 세상의 흐름이자 원圓처럼 생각되었다.


“너의 뜻을 가납한다.”


축하한다

고는 하지 않았다. 그 말은 그 곳에 떨어뜨리기에는 아직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 이한은 연각이 물러간 후 왕에게 미리 올린 그녀의 사직서를 넣은 자리에서 새 종이를 꺼내 지필묵을 놓고 썼다. 

조금 생각하듯이 망설이다가, 섬강暹康.

반듯하면서 유려한 글씨로 묵을 눌렀다. 왕은 그것을 그녀와 시강의 혼인선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강 옆에 꼭 어울리는 이름으로, 그리고 왕이 생각하는 그녀의… 

  

그 때, 어느 틈엔가 이한의 곁에 서 있던 부제조상궁 유씨가 말했다.

 

“예영 경이, 시강 후와 가례를 올리신다고요.”

“그래.”

“상공은 충신입니다.”


이한은 나뭇잎처럼 낮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리고, 예영 경도 왕의 충신입니다.”


유상궁은 충신, 이라는 말에 날선 힘을 실었다. 이한은 늙은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왕은 유씨 역시 왕의 충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한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서랍을 열고, 섬강暹康, 빈 세계에 해 돋아 가득 채워진 그 그림을 넣고 잠궜다.

결국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


동백이 졌다.

그 꽃 답게, 붉고 둥근 꽃 그대로 떨어졌다.


땅 위에 활짝 피었다. 


 





  




  1. 동백의 꽃말 : 기다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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