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폴더를 뒤지다가 찾았다.
옛날 하드에 있던 폴더를 뒤지다가 신기한 것을 많이 발견했다.
옛날에 쓴 글들을 보면 내가 이런걸 썼단 마랴??! 라면서 묘하게 흥미롭다...마치 남의 글을 보는 것처럼 ^_^...이 글은 2008년 7월의 글인데 간택 때 냈던 글인것 같다. 내 기억으로 이 간택은 간선될 목적으로 쓴 글은 아닌데 그래서 더 재밌는듯? ㅋㅋ 다시 보니 기억도 살아나고 꽤 재밌는 설정인것 같아 좀 수정해서 미실녀같은걸 할 때 써먹어볼까도 싶다. 그래서 올려둠. ㅎㅎ
참고로 소서노는 M국에서 신녀의 우두머리 칭호, 여미연은 신녀 직위 같습니당...
"이제 곧 시학당을 졸업하게 된다며?"
수줍음과 설레임으로 나는 두 손을 꽉 맞잡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했다. 나는 늘 사촌 오라비인 희성(喜聖)을 몹시 좋아했다. 어릴적에는 그 뒤를 졸졸 쫓으며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배우려 들었고, 지금도 그가 도성에 들렸다는 소식을 듣고선 득달같이 허가를 얻어 사가를 찾았을 정도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에게도 딱히 부녀 다운 정을 붙일 새도 없이 이모의 집에 맡겨져 살다 시피한 나에게 오라비는 유일한 의지처, 가장 믿어 의심치 않는 친우였다. - 다음 봄에는 혼인도 한다 하고 … 이제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구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배시시 웃었다. - 아아, 오라버니두 참.
서늘한 정자 곁에는 나무가 바람에 조락한 잎사귀를 하나, 둘 떠나 보내고 있었다. 고운 단풍잎 하나가 손등에 나붓이 내려앉았다. 바람에서 가을 내음이 난다. 맑은 노란 빛의 국화차. 희성은 가을이면 손수 국화 찻잎을 말리고, 우려내 대접해주곤 했다. 시학당에 입학하고 다도를 배우며, 내가 국화차 끓이는 법을 얼마나 정성들여 익히고 연습해왔는지 그는 알까? 그리고 매번 이렇게 그와 만날 때마다, 얼마나 조바심을 내는 지도. 희성이 다종을 들고, 나는 기다린다.
"료희(瞭希). 이 국화차 맛이 참 좋구나."
솔직히 나는 이런 자신에게 번번히 조금 놀란다. 희성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칭찬 한마디에 양뺨에 홍조를 떠올리는 내가 시학당에서는 '냉철하고 빈틈없고 엄격한' 가리낭(佳梨娘)으로 이름이 높다는 것을. - 오늘 떠나신다고요? 옆에 있던 친구 마리(麻里)가 불쑥 물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만큼이나 서운함이 묻어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속으로 빙그레 미소짓는다.
마리 정도라면 아깝지 않다. 나는 국화차를 한모금 더 음미했다.
"료희가 임관(任官)하게 될 때 즈음 한번 더 찾아오지."
단풍잎이 하나 더, 소리 없이 낙하했다. 그것이 손등 위를 또르르 굴러 아래로 떨어진다. 나는 웃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기다릴게요, 라고 말하려 고개를 들었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가을 바람에는 온갖 것이 떠돈다. 가을 먼지 - 반쯤 흙이 되어가는 가을 낙엽, 허리가 꺾여진 코스모스, 아직 사라지지 못하고 보기 흉한 자세로 말라 비틀어져 있는 해바라기, 낮게 나는 가을 잠자리의 날갯짓 소리…. 그리고 나는 순간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료희?"
그것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누가 목을 짓누르는가 싶더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손 안에서 잔이 힘없이 쑤욱 빠져나가 떨어졌다. 사기로 된 잔이 데구르르 나무 정자 위를 구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다가 역시 맥없이 사라진다. 료희, 료희! 희성과 마리가 이구동성으로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마저도 마치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울렸다. 나는 시야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 눈꺼풀이 차츰 가라앉으면서 찾아오는 그런 어둠이 아니라, 막막할 정도로 깊고 검은 장막이 눈 앞을 덮쳐 짓누르는 듯한 … 적막 … 어둠. 사방이 깜깜하고 고요에 잠겼다. 나는 애써 내게 남아있는 감각을 이용해 정신을 차리려 애쓰지만, 느껴지는 것은 몸이 평형감각을 잃는 듯 휘청 하는 느낌 뿐이고 - 나는 내가 나무토막 처럼 쓰러졌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저 그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이 걷혔을 때, 그곳에서는 바람이 왱왱 우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아니, 바람이 이런 소리를 내며 불었던가? 눈 앞에는 알 수 없는 형상들이 지나갔다가, 사라져갔다. 그것이 미처 무엇인지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분명 발바닥 아래에 느껴지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그리고,
허공을 가르는 비명소리.
천지를 뒤흔드는 울음소리.
땅 위에 진 그림자는 길었고,
피가 낭자한 ….
헉, 하고 나는 짧은 숨을 토해낸다. 그와 동시에 빛이 번쩍 하고 들어왔다. 내가 누워있고, 눈을 떴다는 것을 인식하기 까지는 짧지 않는 시간이 걸렸다. 마리가 내 어깨를 부여잡고 마구 흔들어댈 무렵 쯤에.
"료희, 료희. 너 정신이 드니? 괜찮아?"
누워있는 곳은 내 방 안이었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진다. 너, 갑자기 차를 마시다 정신을 잃었었어. 기억나? 마리의 말에 겨우 정신을 가다듬는다. 일이 그렇게 된건가. 도대체 그건 뭐지? 내가 본 건 대체 ….
순간 섬광처럼 머릿속으로 '그것'이 번쩍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리 ! 오라버니는?"
"저녁까지 네가 깨어나길 기다리다 갈 길이 급해 결국 방금 돌아가셨어. 의원도 네가 그저 잠든 것이라고 하고 …."
안돼. 마음 속의 내가 외쳤다.
나는 아직도 나에게 일어난 일을 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 안돼! 막아야 돼! - 몸이 먼저 득달같이 움직였고 마치 이성을 잃은 사나운 맹수처럼 나는 방문을 거세게 박차고 뛰쳐나갔다. 가지마세요, 가지마세요, 가지마세요!
가면 안돼 ….
마당의 고목(古木) 그림자가 짙었다. 짙고, 긴 그림자. 나는 대문 앞에 스르르 주저 앉았다. 늦었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마음 속의 목소리가 또다시 말한다. 이제 안돼, 너무 늦었어. 그는 …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스스로 생각해놓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덜덜 떨며 소름이 돋은 양팔을 감쌌다. 영문을 모르는 마리가 뛰어나와 내 양 어깨를 일으켜 세우듯 안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마리에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글쎄, 그것은 그저 꿈이었을까. 하지만 꿈 아닌 꿈. 나는 한번도 이런 생생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때 대문으로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이곳이 모연문의 저택이 맞지요? 큰일입니다. 큰일 !!"
아,
그순간, 내 곁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완벽한 파괴의 손길은 신속하게, 그리고 점점 더 강렬하게, 나의 세상을 조여왔다.
.
.
"과연, 앞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을 가졌구나."
머리 위로 성녀(成女)의 음성이 맑게 떨어졌다. 아름답고, 고귀한 목소리.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가 그 고운 손을 들어 나를 내쳐주기를 내심 바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신궁이었고, 어쩌면 신의 눈이 가장 가까이 근접한 곳인지도 모르는 데도, 나는 신을 부정하는 불경한 여자로. 신을,운명을 부정하는 … 그러나 운명을 '말하는'.
그건 그저 기분 탓이었을까. 내 능력을 그렇게 긍정한 뒤 소서노는 한참 침묵을 지켰고, 나는 감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진 못했지만 그 침묵이, 그리고 머리 위로 느껴지는 그녀의 눈길이, 어쩐지 나를 가여워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 난세(亂世)의 … 예언자라."
"그것도 네 운명이겠지."
그때로부터 줄곧. 나는 십수년을 살면서 그토록이나 우습게 여겼던 그 단어 - 운명 - 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 훗날 소서노는 신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 그 답을 내게 준 듯도 싶지만. 그것은 그녀의 답일 뿐.
나는 아직 그 답을 찾기 위해 세상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
**
천제(天祭)가 열리는 아침이었다.
신궁의 아이들이 제 키만큼 큰 비를 들고 신궁 앞 마당을 쓸고 있었다. 쓸어내린 곳을 쓸고, 또 쓸고 … 한톨의 먼지가 뒹굴어도 당장 신녀님의 날벼락이 떨어질 그런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뿐 아니라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곧 신궁의 문이 걸어잠기고, 단단히 꼰 금줄 아래로 도화목과 치우의 형상이 그려진 기가 내걸릴 것이다. 소서노가 신언(神言)을 받기까지 몇날 밤이 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젊고, 어리고, 그래서 치기 많은 신녀들 사이에선 많은 말이 돌았다.
소서노는 이제 나이가 들어 신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도 했고, 오히려 연륜이 깊어져 신에게 더 가까워졌으니 좀 더 깊은 신의 말씀을 얻어낼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소서노가 이번에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신탁을 내림 받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물론 그 떠도는 소문에 나는 가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내 옆에 잘 들뜨는 말괄량이 어린 신녀가 한사람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제례에 올릴 향유와 정화수를 바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새벽부터 그것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비파연영도 그런 내 곁에 함께 서 있었다. 어려서부터 신궁에서 자라온 그녀는 신궁의 이런 대례마저 이제는 자못 재밌고 즐거운 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시끄럽게 재잘댄다면 벌을 받겠지만, 그녀는 종내 입가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모르며 빙글빙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저기 주작신녀장님 아냐?"
멀리서 다가오는 여미연을 발견한 것도 그 비파연영이었다. 팔을 쭉뻗어 가리키는 그네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고서, 나는 한발작 내딛고 허리를 숙였다. 그저 지나쳐 가리라 생각했던 여미연의 발걸음이, 문득 내게 와 멎었다.
"비파연을(斐波璉乙)?"
나는 자못 놀라면서도 차분히 예, 하고 대답했다. 힐끗, 곁눈질하자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비파연영도 무슨 영문인질 모르겠다는 듯이 뚜릿뚜릿 두 눈을 굴리고 있었다. 주작성천신녀는, 고개를 약간 치켜들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오늘 제(祭)를 올릴 때 내 옆에 와 서거라."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이 아연해졌다. 성천신녀들의 곁이라니, 그곳은 영광되고도 … 두려운 자리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지만 그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합당한 이유도 근거도 없다…. 어째서, 하고 운을 뗐지만 신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을 내리꽂듯 날카롭게 반응했다.
"어디서 감히 토를 다느냐? 성모(聖母)님의 명(命)이시다."
성모…? 소서노가? 번번히 같은 표현이지만, 나는 다시금 놀란다. 그리고 그런 나를, 주작신녀조차 추궁하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더이상 물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녀는 내게 올바른 답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억누르고, 존명의 뜻으로 고개를 다시 숙였다. 성천신녀는 그런 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곧 방향을 틀어 다시 그녀가 가야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서야, 나는 몸을 일으켰고 잠시 멎었던 숨을 토했다.
대체 … 어째서 ….
"역시 그랬나아 ~"
비파연영의 태평한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비파연영은 이런 나와는 달리 이 사태를 아주 잘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한손으로 턱을 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렸는데,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비파연영이 먼저 입을 열어줄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모두의 말이, 비파연을이 다음 주작신녀장이 될 거라던데 사실이었나 보네."
비파연영은 부러움과, 질투가 반반씩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마치 격려하듯이 미소지으며 그 작은 손으로 내 어깨를 한번 툭 친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다음 주작 성천신녀의 운(運)이라면, 다른 이에게 있다.
나는 비파연영의 맑은 눈을 잠시 들여다 보았다. 역시 주작의 힘을 부여받은 그 눈을…. 그러나 비파연영의 수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인지 - 그녀에게서 나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고, … 성천신녀의, 소서노의 곁이라는 압박감 탓인지 나는 몸이 갑자기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몸을 휘청하자, 비파연영이 놀라 나를 부축했다.
- 잠을 못잔 것 아냐? 어린 신녀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
.
천제가 시작되고, 나는 주작의 여미연이 이른 대로 소서노를 위시한 성천신녀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다. 원래 법도 상 그곳에 위치하고 있는 상급신녀들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지만, 그들도 들은 이야기가 있는 지 잠자코 내게서 눈길을 곧 하나, 둘 거두었다. 내 눈은 잠시 똑바로, 소서노를 바라보았다. 나는 성모가 나를 찾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불러 세운 나를. 비록 천제가 시작되면 아무도 사사로이 입을 열 수 없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나와 눈을 맞추고, 그 깊고 검은 해면같은 눈동자로 내게 말해주리라고. 어째서 당신이 나를 부르게 되었는지,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하지만 그녀는 황제에게조차 입을 다물었어, 알고 있지 않아?
그렇다, 그녀는 어쩌면 내게도 함구할 지 모른다. 그리고 내 스스로 알아내기를 원할지도…. 제례가 시작되고 한참이 흘렀을까. 모든 동작들이 멈추고, 희고 높이 괸 촛대만이 조용히 제 몸을 불사지르고 있을 무렵, 나는 문득 소서노가 나를 바라보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눈을 들어 그녀를 찾았다. 그녀의 눈이, 그녀의 눈이 내게로 … 하지만 눈앞이 흐릿했다. 너무 오랫동안 깊은 어둠 속에 두어서였을까? 그러나 나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어둠속에서 어떠해야하는 지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눈 앞에 어른 거리는 어둠과는 다른 것. 마치 암흑으로 끈끈하게 짜여진 그림자 같은 것이 눈 앞을 짓누른다.
나는 곧 알아차린다. 똑같은 경험을 이전에 한 적이 있다. 처음에 … 처음에 … 신의 뜻이, 신의 능력이 운명을 믿지 않던 오만한 여자아이한테 내리던 순간에 ! 그러나 그 때에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기운이 덮쳐와 나를 당황케 했었다면, 지금은 무거운, 아주 거대하고 육중한 어떤 힘이 나를 내리 눌렀다. 마치 나를 거인이 던진 바윗돌 아래 산산히 부서지는 호수의 수면처럼 산산히 흩어버릴 듯이. 나는 눈 앞이 깜깜해지고, 귀가 멀었으며, 숨이 멎었다. 그리고 몽환 속에서 나는 보았다.
그것은 책 속에서만 보았던 그 수라의 장.
시체를 짊어지고 건너는 핏빛 강.
고통에 찬 울부짖음.
빛이 없는 암흑의 벌판.
그리고 그 뒤로 오는 건 ….
"아 !"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나는 내 비명에 스스로 놀라 깨어났다.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몽환 속을 유영했는 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 몽환이 몽환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느꼈듯이 이건 … 꿈이라면 좋았을걸.
어린아이가 자다 일어나 어머니께 종종걸음쳐 울며 달려가는, 그런 보랏빛 몽상에 지나지 않으면 좋았을걸.
나는 내가 신당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땀에 흠뻑 젖은 예복을 입을 채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신녀들이 빽빽히 메운 신당에는 성천신녀도, 다른 신녀들도 아무도 없이 홀로 였다는 것이다.
아니, 혼자는 아니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를 등지고, 성모가 앉아있었다.
"이게 뭐죠?"
나는 물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녀에게서 대답을 간절히 갈구하며 물었다. 그녀가 황제에게 그랬듯이 나에게도 함구한다면, 나는 그녀에게 거칠게라도 매달릴 작정이었다. 내가 본것이 무엇이죠?말해요. 말하지 않으면 신 앞에서 당신도, 나 자신도, 죽여버리겠어 !
그러나 미처 그렇게 소리칠 기회도 없이 성모는 조용히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아무래도 같은 것을 보게 된 것 같구나."
천제를 올리는 신당의 좁은 창으로 한줄기 빛살만이 비쳤고, 그 빛을 역광으로 받은 소서노는 이상스러울 만치 늙어보였다. 이마와 눈가에 짙게 팬 주름살이 훨씬 도드라져 보였다. -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는 줄곧 신께서 말씀을 내려주시기만을 기다렸지.
불현듯,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너무나도 선명해져서, 나는 갑자기 울음이 북바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을 가엾게 여기거라 … 가리(駕離). 수라의 운명 위에 농락당할 그들을."
신이 내린 운명 앞에. 그 잔혹한 발 밑에 끓어 엎드려 !
"성모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는 그녀를 불렀다.
"누가 뭐래도."
"신께서 가장 농락하고 계시는 건, 바로 저예요."
가리駕離.
그러나 운명의 멍에는 언제쯤 떠나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