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한은 그녀에게만은 늘 조건부 항복 상태였다
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적장의 목을 베고, 가능한 많은 군사들을 살려 귀환하는 그를 뭇 사람들은 검재(劍才)다, 투귀(鬪鬼)다 하는 말로 칭송했지만 사실 리한(利翰)이 남들 보다 유난히 뛰어났던 것은 다름아닌 생존본능이었다.
혹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그는 늘 죽기를 각오했지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 탁월한 판단력을 보유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살기를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리한이 막 전장에서 검을 잡았을 때 흑월의 가신 중 한 사람이자 의휼단에 오래 몸 담은 리한의 상관이었던 자는 영예로운 죽음을 위해 싸우라고 말했지만 리한은 살아남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리한은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 다시 전쟁터로 되돌아갔다. 열여덟, 리한은 결코 승산이 없는 전장으로의 진격을 강압하는 상관을 죽였고 남은 군대를 데리고 후퇴했다. 상관의 죽음을 본 부하들은 하나 같이 영예로운 죽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의 시체는 공적을 인정받고 추서 되었다. 그 다음날, 리한은 상관의 것이었던 군대의 선봉장이 되어 전장으로 나섰다.
살기 위한 방법은 언제나 똑같지 않았다. 어쩔 때는 죽였고, 어쩔 때는 도망쳤으며 또 어떤 경우에는, 죽이지 않았다.
리한은 격선이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격선을 죽이지 못하리란 사실도 알았다. 리한은 알고, 격선은 몰랐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습니다.
오직 그것 뿐이었지.
서문 무진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더이상 말을 잇지 않는 그를 보며 리한은 더 이상 변하지 않을 사실이 명징하게 와닿는 것을 느꼈다.
혼영례는 끝났다. 삶도 죽음도 단 한 순간이었다. 단 한 번의 착오가, 패잔병과 죽음을 낳는다.
그렇지만 리한 역시 판단 오류를 범했다. 그 검이 얼마나 깊숙이 친우의 팔을 찔렀는지. 절대로 검을 놓은 적 없을 것 같은 무쇠의 팔을 근육이 너절해지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까봐 그만큼이나 두려워했다는 의미다. 리한도 잠시나마 착오를 일으켰다. 단지 리한의 착오는 상대에 관한 것이고, 그의 착오는 그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점만이 달랐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착란이 언제나 더 큰 대가를 치른다.
리한은 그녀가 검을 드는 이유가 자신과 같았기 때문에 리경을 좋아했다. 리경은 살기 위해 검을 쥐었다. 살기 위해 싸웠고 살아남기 위해 전쟁터에 투신했다. 리한이 이렇게 말한다면 리경은 대꾸할 것이다.
누가 죽기 위해서 싸워요?
리경이 그렇게 말한다면 리한은 말을 도로 거둘 수 밖에 없다. 다르다. 리한과 리경의 검은 달랐다.
리한이 검 끝에 알량한 이유와 사명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쪽이라면 리경은 그저 살기 위해, 순수하게 살기 위해 싸웠다. 전쟁의 화마 속에 태어나, 난리통에 가족과 모든 것을 잃은 여자가 살아 남는 방법은 검을 쥐는 것과, 전쟁에서 이기는 것 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무가의 자식도 아니면서 의휼단이 이끄는 군의 졸병으로 들어와 군대의 모두를 남김없이 이겼다. 리한을 제외하고. 물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리한은 언젠가 그녀에게만은 늘 조건부 항복 상태였다.
리한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름을 외지 못하는 선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무장으로서 제국과, 흑월을 위해 싸웠다. 전장에 나선 것은 열다섯이지만 검을 잡은 것은 다섯살때부터다. 그는 군대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길러졌다. 전쟁터에 서는 것은 리한에게 생존의 방법이 아니라 생존의 이유였다. 사람을 베는 방법만 아흔 아홉 가지를 넘게 배우던 어느 날 리한은 부친에게 물었다.
검사와 살인귀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살인귀가 되지 않는 방법이 알고 싶으냐, 교하.
네 검날 끝에 적의 목숨이 아니라 이상을 두는 것이다.
이상 혹은 신념. 전쟁을 위해 살아온 자에게 그것의 존재 여부는 중요했다. 이 전쟁은 그를 얼마나 그의 이상향으로 나아가게 해 줄 것인가. 이 전쟁의 대의는 무언가.
그러나 부친은 또한 이어 가르쳤다.
이상을 좇느라 네 눈앞의 죽음에서 눈 돌리지 마라.
네 앞의 죽음을 기억해라. 교하. 기억해라. 네가 살인을 했음을.
하나의 목표점을 위해 싸우는 것과 동시에 숱하게 일어난 전쟁과 죽음을 하나의 점으로 치환하지 않는 것, 두가지를 동시에 충족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리한은 균형을 맞춰 줄 한쪽 추가 필요했다. 리경이 그의 기울어짐을 막아 줄 추였다.
리경의 검은 갈망하는 것이 단순해서 호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리한은 그녀와 처음 검을 겨누었을 때를 기억한다. 군의 병졸들을 상대로 한 사람씩 훈련 겸 대련을 했을 때였다. 훈련의 일환이었을 뿐 누구도 리한에게 이기려고 검을 맞대는 자는 없었다. 리경은 그무렵 의휼단 휘하에 막 들어온 신입이었다. 리한은 대번에 그녀의 손에 먼저 시선이 갔다. 검을 만진 지 얼마 안 된 손... 그러나 그 양손이 절대로 검을 놓는 일은 없다는 듯 다부지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기본기는 탄탄한데. 리한은 리경이 내지르는 검을 피하며 생각했다. 동작은 거칠지만, 그 모양이 어딘지 처절한 데가 있었다. 절대로 죽지 않겠다는 결사가 검을 받아내는 온 몸을 타고 느껴진다. 대련 자체는 썩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활활 타오르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삶의 의지가 너무나 생생한 나머지 리한은 그녀를 신뢰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녀라면 어떻게든 그와 함께 살아남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것이 설령 지옥 한가운데라도. 리경의 다리가 꺾이고 털썩 연무장에 쓰러졌을 때 리한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리한은 리경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다음 대련을 기대하고 있겠다."
"...별호가 어떻게 되지? 내가 널 뭐라고 부르면 될까."
주변에 낮게 웅성거렸다. 흑월 가신문 출신이며 의휼단 내에서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려가는 와중인 무장이 일개 병졸에게 이름을 묻고, 다음을 말하다니,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살아 남은 전쟁의 수가 늘어나고, 베어 낸 적장의 목이 쌓일 수록 승리의 광영 속에 싸여 살게 될 운명인 리한에게 리경은 전쟁이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수단으로서만 기능해야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이었다. 전쟁이 남기는 것은 죽음이고, 손에 넣는 것은 삶이라는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게 하는 존재. 그래서 리한은 자신이 목을 베어 죽인 상관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리경을 그의 부관 자리에 두었다. 그가 죽음의 영광 아래로 내달릴 때 언제든지 그의 목을 베어 넘길 수 있는 자리였다.
관복 차림의 리경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리한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눈을 돌려 창 밖의 하늘을 한 번 보았다. 아직 해가 채 넘어가지 않은 시각, 이 시간에 여기까지 당도하려면 퇴청 하기가 무섭게 부리나케 말을 달려야 가능할 텐데. 굳이 리경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그녀의 급박함을 가늠한 리한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꽤 열받았나 보군.
아닌게 아니라 다짜고짜 첫 말문을 연 리경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신랄하게 그를 비꼬고 있었다. 리경과는 전쟁터에서 만나 그녀와 그 사이에 이룬 모든 관계는 전장에서 이루어졌다. 신속, 적확이 최고의 가치인 전투의 순간을 함께 하며 두 사람은 이미 말을 빙빙 돌릴 만한 예의범절이나 체면, 여유 같은 것을 서로에게서 벗어 던진지 오래였다. 둘다 십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쟁터에서 뒹군 시간이 나이의 절반 가까이 되는지라 북경의 중앙 조정에 각각 중요한 위치를 맡고 있는 지금도 입에 익은 거친 말투가 튀어나오기 일쑤일진데 단 둘이 있을 때야 말할 것도 없었다.
바보니, 구제불능이니 하는 거친 단어가 리경의 입에서 쏘아져 보이지 않은 투구를 쓴 것 같은 리한의 이마에 텅 부딪치고 별다른 소득 없이 떨어져 내린다. 리경도 어차피 알고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저토록 꿋꿋한 여자라니. 리경은 리한의 앞에 엎드려 충언이나 직언을 하는 신하가 아니다. 그녀는 리한의 등뒤에서 훈계하고 호통을 치고 때로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의 부장(副將)이다. 혹은, 군대의 누군가를 입을 빌자면, 그의 보모다.
그것은 리한이 그녀에게 안배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리경 스스로가 자처한 면이 있는 역할이었다. 누나로 예우해줘본 적도 없지만 가끔 리한은 자신 보다 한살 연상인 리경이 그를 남동생처럼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한은 리경의 말에 동의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녀의 말을 막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리경은 어차피 리한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하러 온 것도, 리한의 이상에 대해 그가 생각을 바꿀 때까지 토론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리경은 그저 그녀가 느끼기에 어리석은 리한의 결정을 무산시키러 왔다. 논리든, 비논리든 그녀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
"...포기하시죠."
"리경."
그녀의 말이 끝맺자마자 리한이 그녀를 불렀다. 입안에서 차갑고 무심하고 익숙하게 미끌어지는, 유리(璃)처럼 맑고 명징한 그녀의 별호.
"...리경, 나는 혼영례를 치른 첫번째 흑월의 가주가 될 거다."
세상은 그것을 당연하게도 혼영례 승리의 결과라고 보겠지만, 사실상은 리한의 결정에 달린 일이었다. 서문 무진이 계획하고 의휼단의 맹수들이 따른 혼영례, 서문가와 흑월의 재편성, 그 모든 것의 토대 위에 첫번째 제물로서 흑월에 바쳐지기로 리한은 결심했던 것이다.
"당연히 나는 모든 것을 가지기 위해 기꺼이 손을 뻗어야 해."
흑월의 주인이란 응당 필요한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자여야만 하니까. 검은 밤 하늘을 장악하는 검은 달... 리한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주인이 되고 싶었다. 패자의 피는 목을 축이는 데만 쓰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만 안락한 뜰을 채우는 건 그에 걸맞는 행동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잘 아는데, 나는 그를 죽이거나 변방으로 쫓아보낼 수는 없어."
"내가 믿는 그 역시, 가문을 위험에 몰아넣을 악수를 둘 자가 아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케케묵은 말이 있지.
만일 그에 대한 내 판단이 틀렸더라도, 차라리 나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도 분간 못하는 것보다야...
리경이 이 모든 것을 턱 없는 이상이라고 부를지라도, 그리고 결국엔 그녀가 옳더라도 리한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리경이 그 자신을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리경에게 전쟁 이후의 세상, 전장 너머의 시대에 대해 그가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의 신념에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시작한 일일지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것이 나름의 의미와 사명을 띠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리한은 리경이 언젠가 자신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것은 그녀의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틀릴지라도. 완전히 틀릴지라도.
"그러나 만일 내 결정이 흑월이나, 내 사람들을 사지에 몰아 넣게 된다면..."
"그 때는 내 등 뒤의 네가 날 베면 되잖아."
그렇다면 구원 받을 수 있겠지.
나도,
흑월도, 내 사람들도, 제국도,
그리고 리경 너도.
세상이 뒤집어 질 때 왕의 살해자야 말로 일등 공신 취급을 받는 법이니까.
"그러니, 이쯤 해두고 함께 석반이나 들러 가자."
리한은 의자 양 팔걸이를 잡고 몸을 단숨에 곧게 세웠다. 흑색 도포가 펄럭이는 낮은 소리를 내며 교의에서 흘러 떨어졌다. 리경이 자신의 충고에 대한 그의 답변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건 아랑곳 없이, 그는 한손을 리경을 향해 내밀었다.
"공무를 마치자 마자 예로 달려오느라 시장하잖아..."
리한이 짐짓 엄숙한 어조로 덧붙였다.
"정무든 전쟁이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리한이 과장되게 머리를 크게 설레설레 젓곤 리경을 슥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리한은 자신이 내민 손을 흔쾌히 잡지 않는 그녀의 목을 탁 채어 잡듯 팔로 감았다.
자신에게 붙잡힌 리경을 안다시피 이끌고, 리한은 큰 걸음으로 내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