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ali 2020. 8. 9. 13:00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좋아하는 것이 같다는 것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같이 좋아해야 그것이 사랑이 될 수 있지.

좋아하는 계절,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시, 좋아하는 그림, 좋아하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사랑하게 되는 걸까?그렇다면 두 사람은 언제나 한 곳을 바라보아야 하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그가 갖고 있다면, 이상으로 여기는 모습을 닮아있다면, 자꾸만 시선을 주게 되는 곳에 언제나 그가 있다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낼 수록 이유는 무연해져가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이유를 한 자리로 모은 곳에 그녀가 있는 것이었다.

 

 

"또, 누가 먼저 가져갔단 말인가?"

 

승조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점 주인에게 되물었다. 주인은 진땀을 흘리며 미안해하면서도 그것이 퍽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어조였다.

 

"저도 상서 나리가 그 신진의 시선을 기다리셨다는 걸 알고 있습죠. 하지만 또다른 구매자 분도 저에게 여러 번 부탁하신지라.."

 

그게 누구냐고 묻고 답을 얻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이 대답하는 이름은 늘 같았다.

 

"그렇다면 먼저 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네."

 

승조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뒤돌아 섰다. 하릴 없어 승조를 동행했던 예부의 동료이자 학당 시절에는 동기생으로 오랜 지우인 소권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한 발 뒤쳐지는군. 화첩이든 시집이든 새로운 물건이 나올 때마다 귀신같이 빠르단 말야."

"부지런 한 거지. 여란도의 업무도 바쁠 텐데 유행하는 문예에도 언제나 밝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다곤 해도 항상 자네랑 선호하는 시인이며 화가가 겹친다는 건..."

 

그러나 약간 들뜨기까지 하며 말을 잇던 소권은 그 다음 말을 소리내지 않고 삼켰다. 화제에 올리고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역시 동기생이고 요즈음 여란도에서 잘 나가고 있는 소교인 그녀이고, 흑월 가신문인 우씨문중의 영애다 보니 함부로 말을 내뱉을 게 못된다는 빠른 판단력의 발로였다.

 

무엇보다 바로 옆에 있는 올곧은 양반이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두고보지 않을 것이기도 했다. 참, 누가 봐도 명백한 것인데 말이지. 그는 들리지 않게 혼잣말했다.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자기 일에 관해선 바보가 되어버리는 법인지...

 

"무슨 뜻이지?"

 

아니나 다를까, 소권이 말을 하다 멈추었는데도 승조는 그를 돌아보곤 물었다. 한쪽 눈썹이 조용히 세워 당겨졌다.

 

"아니... 늘 같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거지."

 

소권이 하려던 말의 반쯤은 뭉게버리며 그렇게 말하자 승조는 곧바로 별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상할 것도 없어. 그 시인은 신진이지만 첫 시가 시사에 알려졌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던 자였고, 화백도 마찬가지니."

"유명해진 이름을 들어 알 수는 있다곤 해도, 시선이나 화첩을 사모을 만큼 좋아한다는 건 다른 문제지 않나?"

 

말이 나온 김에 소권은 더 참지 못하고 보태어 말하고 말았고 이번에는 승조도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항상 승조가 수집하기로 마음 먹은 시선이나 화첩, 글씨 같은 것들에 그녀도 같은 마음을 먹고 있다는 뜻이었다. 공교롭게도.

 

이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일까? 승조는 다시 한 번 휙 소권을 돌아보았다. 소권은 웃을 듯 말듯 입가를 실룩이며 눈을 마주쳤다. 그가 무언가 답을 갖고 있는 것 같았지만, 승조는 왠지 묻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쓸데 없는 소리 하지마."

"나 아무말도 안했는데."

 

소권이 억울하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들었다.

승조는 흥, 하며 고개를 돌리고 성큼 성큼 앞으로 혼자 나아갔다.

 

 

승조가 관시를 치기 전까지 모시고 사사받았던 스승은 원 말기 문사들이라면 모두 그 이름을 알만한 학자로, 평화로운 치세에 태어났다면 대학자가 되었겠지만 난세에 학업을 이룬 까닭으로 이곳 저곳을 문객으로 떠돌다가 명 황조가 개창하면서 수도인 북경에 자리 잡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 이름이 높은지라 황성에서도 여러 번 부름이 있었으나 그는 불안한 시절에 자신의 쓰임이 커지려면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들을 키우는 데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굽힌 적이 없었다. 남녀와 또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재능있는 자는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그로부터 십년, 그 문하의 학도들이 제국의 중심부에서 저마다 역할을 이루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기 떄문에 일 년에 한 번, 스승을 모시고 동기생들끼리 하는 동창회와 사은회를 함께 겸하는 행사는 점점 더 그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지는 중이었다. 

 

특히 당해는 밖으로는 원의 잔존세력이 소탕되었던 데다가 안으로는 황제의 후계가 결정될 정도로 제국이 평화로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좋을 첫번째 해였기에 그 흥취가 더욱 높이 흔들렸다. 항상 방종을 경계하라고 훈시하는 스승도 그 날은 기꺼이 취할 것처럼 기분이 좋아보였다.

 

"잘 지냈어."

 

마침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자리가 비었기 때문이었다. 승조는 옆도 돌아보지 않고 한 걸음에 그 앞에 자신의 빈잔을 들고 다가가 인사하고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간 격조하였지."

 

남들 앞에선 언제나 해사하게 웃는 그녀가 승조를 발견하자 예의 깍듯한 미소만 지어보이는 것도 승조는 더이상 곤혹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와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이유는 그런 곳에 있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어쩐지 한 번 더 시선이 머무는 곳이라 지켜보았을 따름인데, 그러는 사이에 승조는 재하에 대해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다.

 

늘 누구보다 먼저 학관이나 서고에 나타나 학문을 닦는 데 부지런한 모습이라던가. 누구는 잡기라고도 하는 예술과 교양과 규중의 소양까지도 완벽하게 아우르는 면모, 그렇게 자신을 갈고 닦는데 바쁘면서도 남들을 챙기는 친절과 배려심, 그리고 그것이 학당을 떠나 여란도의 소교로 재직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아랫사람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평판까지.

 

거기다가 승조는 재하가 한 점 그늘 없는 우씨문중의 금지옥엽이라 그저 표면적인 표현 그대로인 줄만 알았었지 사실은 그녀가 조실부모하고 나이 열셋에 당숙댁에 홀로 맡겨져 자랐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하나 뿐인 오라비는 그녀 곁에 있을 때보다 전장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길었고, 혈육이 사지에 있을 적마다 그녀의 마음도 그곳에 함께 했을 터였다. 꾸밈없이 밝은 그녀에게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그림자 진 사연이었다. 승조는 그녀에게 더 감격하고 말았다.

 

기품있고, 상냥할 뿐만 아니라 용감하고, 의연하다.

햇살을 빚어 인간을 형상화한다면 그와 같지 않을까?

 

"재하."

 

늘 부르던 동기생의 호인데 오늘은 입 안의 울림이 어색하다.승조는 어쩌면 이와 같은 말을 꺼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일 년에 한번 모이는 동창회에서, 네가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시사에서 나는 언제나 네게 말을 걸고 싶었어. 늘 바쁘고 인망이 높은 너는 잠깐 사이에 내 시야에서 멀어지기 일쑤였지만. 너와 이야기를 하고싶어. 조금만. 그러니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데."

 

승조가 예의 그 차분하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하의 동그란 눈이 승조를 올려다 보았다. 승조는 그 눈을 응시하며 들여다 보았다. 

 

천연의 보옥이란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타고난 그대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가진 것을 다 내어 보여줘도 비지 않는 생이란 것은...

 

 

모임은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다들 거나하게 오른 흥취와 술기운, 그리고 들뜬 이후의 피로감 때문에 똑바로 앉아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공식적으로 파했다.

그 와중에 가장 똑바르게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승조였다. 그를 사이에 두고 술잔이 여러 순배 돌았지만 그는 도저히 취할 수가 없었다. 

 

실연을 당한 남자가 취한다면 얼마나 추해질지가 걱정이었다. 실연을 당해보기는 처음이었지만 오히려 처음이었기 때문에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으면 스스로도 모르는 자신이 튀어나올까봐 두려웠다.

 

어차피 스승의 문하생들은 서무동의 고만고만한 위치에 다들 모여살고 있었으므로 모임장소로부터 집까지 그리 오래 걸리는 길은 아니었다. 터덜터덜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승조의 눈 앞에 낯익은 인영이 띄었다. 한눈에 봐도 술에 취한 것 같은 걸음걸이로 승조보다 몇 걸음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승조는 발걸음을 좀더 재촉해 재하를 따라잡았다. 그러나 나란히 걷거나 그녀를 앞서지는 않았다. 순간 재하가 뒤돌아볼까 염려되기도 했으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언가에 신나기라도 한듯 약간 들떠보이기까지 했다. 승조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오늘 한 행동이 재하의 심기를 크게 어지럽히지는 않은 것 같아서.

 

사실은 처음부터 크게 실례되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직 자신의 생각에만 매몰되어서 저지른 실수라고 승조는 그 날의 고백을 정의했다.

 

당장 내일의 일을 알 수 없는 난세에야 혼인을 미루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주변을 잠시만 둘러봐도 과년한 청년과 규수가 산적했다. 막 입직했을 때에도 아직 안정된 기틀을 갖추기까지 많이 남은 제국을 위해 한 몸 바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혼담을 제쳐두었다. 그렇게 올해 나이 스물 다섯. 두 황자에게도 사대월문의 낭과의 혼인 얘기가 나오는 지금  승조에게 더이상 그것을 멀리할 이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승조는 부모가 정해준 꽃 같은 귀족 가문의 여성과 정혼할 터였다. 그림 같은 가정을 이루고 옛 성현의 말씀에 나온 그대로의 인생을 살며 해로하겠지. 그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성의 얼굴이 좀더 구체화 된다면 어떨까... 단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부모가 골라줄 만한, 번듯한 가문의 완벽한 숙녀이면서,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시서화에 두루 걸친 취향도 비슷하며, 성향이나 주변의 평판도 닮은 그런 여자라면, 그녀라면...

 

그는 가슴 깊은 곳에 내재된 두려움을 보다 잘 억누르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백 번 차여도 싸지.'

 

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부모님을 종용해 정식으로 성혼을 청하는 혼서를 넣느니만 못한 짓이었다. 물론 단은 그렇게 할 마음까지 먹은 적은 없었다. 부모에게 무언가 바라거나 요구하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밤길이 위험하지는 않을지 마음에 걸려 그녀의 집 가까이까지만 동행하고 돌아설 생각이었는데